
아니 에르노 - 얼어붙은 여자 La femme gelée
오랜만에 읽는 아니 에르노의 작품이다. 아니 에르노의 다른 소설들이 그러하듯 <얼어붙은 여자> 역시 자전적인, 그러나 픽션적이며 또한 메타적인 글이다. 어디서부터 작가의 진심이고 회상인지 어디까지는 허구이고 어딘가는 사실인지를 구분하기 어렵고 또한 그런 구별이 의미 없는 책들.
이전에 <한 여자>와 <남자의 자리>를 읽은 바 있기에 작가의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부분은 꽤 선명하게 기억하는데(그 해 읽은 가장 기억에 남는 소설 중 하나였으며 나 역시 내 부모를, 나의 십 대 시절을 곱씹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던 기억이 선하다) 이 책도 작가의 어린 시절로부터 시작한다. 설거지를 하는 아버지와 물건의 재고를 셈하는 게 익숙한 어머니의 분담을 지켜보는 것에서부터 이러한 남녀의 역할 분담이 얼마나 일반적이지 않은지, 공부만 하면 된다고 말하는 부모를 지닌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작가는 회고하지 않고 그저 서술한다. 마치 한 소녀의 삶을, 소녀가 학생이 그다음에는 대학생이 되어가고 성性을 알게 되고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부당하게 배워가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한 남자의 사랑을 지극히 원하다가도 겨우, 고작 그것을 바라는 자신에게 실망하는 그 모든 과정을. 마치 나 자신의 일생처럼 기술했다.
토요일마다 어머니는 내가 산수와 받아쓰기에서 10점 만점을 받았는지 챙긴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바느질 과목에서 4점을 받거나 품행 점수에서 낙제를 겨우 면한 것에 대해서는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 조금만 산수 과목 점수가 내려가도 어머니는 얼굴을 찌푸리고, 아버지는, 넌 구구단을 외우고 동사 변화 연습할 시간은 없는 거냐고, 딸에게 변명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부모님은 내가 숙제를 할 때면, 물론 놀고 있을 때도 그렇지만, 식탁을 차리거나 접시를 닦으라는 말로 절대 방해하지 않는다. 부모님은 “넌 너만 생각하면 된다"라고 말한다. 이 얼마나 큰 선물인가! 자기를 희생하는 맏딸의 미덕이나, 식전주에 어울리는 안줏거리를 가져오는 심부름 잘하는 막내딸의 매력, 그런 종류의 일은 우리 집에서는 필요하지 않고, 심지어 못마땅해한다. 여자아이가 자신이 쓸모 있다고 여기는 기쁨, 사랑받기 위해서는 자기 방을 잘 정리하고 '얌전하게' 식탁을 치워주는 걸로 충분하다는 생각 같은 건 난 해본 적이 없다. 나 자신과 나의 미래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을 뿐이다. 아주 가끔, 막연하게 두렵기는 했다. 학교에서 완벽하게 공부를 잘하기보다 채소 껍질을 벗기고, 모두에게 아양을 떠는 것이 훨씬 쉬우리라고 생각했다.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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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나는 올바른 방법을 취하지 않는다. 그들의 허세에 대해 나는 공격성, 비웃음으로 대응한다. 나는 고집스럽게 내가 좋아하는 것, 책, 시에 대해 말하고 싶다. 그만해, 아, 그만 좀 하라고. 나는 축구 결승점 이야기도, 장차 수의사가 되려는 남자아이가 말하는 암소 구제역 예방접종 이야기도, 고등학교 샤워장에서 서로의 성기 크기를 비교하는 일상적인 농담들도 참고 견디는데 왜 그만두라는 것인가. 이 아가씨야, 잠깐만, 혼동하면 안 돼, 중국의 부흥에 미친 일본의 영향은... 아! 아! 남자애들 자존심 상하게 하지 말 것, 너 그거 몰라? 내가 모르는 것은 내 마음에 드는 남자아이에게 속마음을 숨기는 것이다. 남자들은 선택하고 싶어 해, 이 친구야. 무슨 상관이야, 나도 선택하고 싶은데. 여전히 나는 그 차이를 모른다. 남녀의 역할을 바꿔버린 이 엄청난 실수 때문에 나에게는 곧 식은 죽 먹기처럼 쉬운 여자아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쉬운 남자아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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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그 여자애들은 쌀쌀맞고 의기양양한 기색으로 다시 돌아오는데, 그럼 그녀들이 결혼한 것이다. 나는 조금 덜 멸시당한다. 집안사람들이 묻는다. 넌 아직도 약혼자가 없니? 부모님은 내가 마쳐야 할 공부가 남아 있으니 아직 안 된다고 이의를 제기하고, 때로는, 내가 지금 상태로 더 행복하다고 덧붙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결코 명백한 설명이 아닌, 오히려 나의 이상한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핑계다. 항상 누군가 내게 거침없이 말한다. “너는 결혼 안 하고 늙을 작정이냐!" 은밀한 압력. 나는 혼자 사는 여자가 아니라, 아직 결혼하지 않은 불확실한 존재다. 사람들은 처녀와는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른다. 뭐 좋은 일 하니? 휴가 때 어디 가니? 원피스가 참 예쁘다. 반면에 결혼한 여자에게는 남편, 아이들, 아파트, 세탁기 등에 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그러나 이 축복받았던, 무사안일했던 삶이 천천히 균열로서 무너지는 것은 결혼을 하고 나서다. 남편과 자신의 목표는 분명 같았는데. 두 사람은 동등했는데. 결혼에 자신을 던진 순간 무언가 달라진다. 낭만적인 사랑의 약속은 여자를 구원하지 않는다.
차이는 시작되었다. 소꿉장난 같은 식사 때문에, 대학 식당은 여름에 문을 닫았다. 정오와 저녁에 나는 냄비 앞에 혼자가 된다. 나는 그보다 더 요리를 잘하지 못했다. 그저 빵가루 묻힌 송아지 고기 커틀릿, 초콜릿 무스나 할 줄 알았지, 특별한 것은 할 줄 몰랐다. 그나 나나, 어머니 치마폭에서 요리를 도운 과거가 없었다. 왜 둘 중에서 나만 이것저것해봐야 하나, 닭은 얼마나 오랫동안 삶아야 하는지, 오이의 씨는 제거해야 하는지, 그런 걸 알아보려고 왜 나만 요리책을 탐독해야 하고, 그가 헌법을 공부하는 동안 당근 껍질을 벗기고, 저녁을 먹은 대가로 설거지를 해야 하는가? 어떤 우월성의 명목으로 이런 일이 가능한가? 나는 부엌에서 내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가 깔깔댄다. “설마 당신, 앞치마를 두른 내 모습을 상상하는 거야! 그런 건 당신 아버지 스타일이지 내 스타일은 아니야!" 나는 굴욕감을 느꼈다. 내 부모님, 별난 사람들, 우스꽝스러운 커플. 그래 나는 감자 껍질을 까는 남자들을 많이 보지 못했다. 내 아빠는 훌륭한 롤 모델이 아니다, 그는 내게 그 사실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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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나는 우울했다. 아무도 시어머니의 종알대는 소리, 가정의 활기참을 우스꽝스럽게 생각하지 않았고, 아들들과 며느리들 모두, 자식들의 교육과 남편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시어머니를 존경했다. 누구도 시어머니가 다른 식으로 살 수 있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간극은 임신으로부터, 이어지는 육아로 점점 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나는 이 소식을 내 어머니에게 알리게 되어 창피했고, 어머니가 눈치챌지 모를 나의 경솔함이 창피했다, 곧 어머니는 기저귀를 갈고 애를 애지중지하는 나를 상상할 것이고, 그런 내 모습을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는 미래의 출생에 대한 소식을 나에 대한 불명예의 소식으로 간주하지는 않았지만 사실 거의 그런 듯이 반응했고, 아버지는 뜻밖의 재난이 우리에게 닥쳤다고 몹시 슬퍼했다.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반응. 세 번째 손자가 되겠구나, 시아버지는 손자 수부터 세어본다. 나는 시아버지의 긍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심지어 가족의 자궁이 되어버린, 내 자궁에도 혐오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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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견딜 만하고, 때로는 재미있다. 혼자 젖병을 물리고 기저귀를 갈면서 생기는 그런 원한은 없다. 엿 같은 일도 같이 나누면 덜 엿 같은 일로 여겨진다. 때로는 사랑과 유사했다. 그는 책상과 장롱 사이를 조심스럽게 왔다갔다 하다가, 창문 앞에서 멈췄다가, 다시 움직인다. 그의 어깨에 하얀색 꾸러미가 있고 그 안에서 흔들리는 조그만 머리가 드러난다. 세상은 있어야 하는 그대로 존재한다. 그의 손 역시 나의 손만큼 부드럽게 아이를 유아차에 내려놓을 줄 알고, 우유 묻은 끈적끈적한 입술을 나만큼이나 부드럽게 닦아줄 줄 알고, 맨팔 위에 우유를 몇 방울 떨어뜨려 젖병 온도를 확인할 줄도 안다. 우리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함께 배워나갔다. 나는 그의 제스처에 무한한 신뢰감을 가졌다. 아이를 내려다보며 까꿍 놀이를 하는 집주인 여자도, 세상의 모든 돌보미도, 그와 견줄 수 없었다. 나는 이런 역할 분담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가 해주는 일들을 영웅적인 행동으로, 내가 직업을 갖는 걸 '허락해 주기' 위해 그가 감수한 희생으로 간주하면서, 그에게 밤낮으로 감사할 생각도 없었고, 온전히 내 차지가 된 설거지와 요리에 대해 경의를 표시해달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나는 여전히 엄청난 착각에 빠져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나 대신 가끔 아이의 이유식을 챙겨 먹이는 일이 자기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 아이에게 먹을 것을 챙겨주고 아이의 기저귀를 갈아준 일을 후회하지는 않겠지만, 그런 일이, 돈이 없고, 학생이라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비롯된, 다소 색다른 일화로 여겨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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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굵은 글자는 임의로 표시한 게 아니라 책에 표기한 그대로 가져왔다)
"대체 하나도 준비된 게 없군! 열두 시 20분이야! 이보다는 계획을 더 잘 짜야지! 내가 도착하기 전에 아이 밥은 먹여 놨어야지. 나는 정오에 편안한 시간을 갖고 싶어. 나 일하잖아. 당신도 알겠지만, 이제 더는 예전 같은 생활을 할 수 없다고!" 그럼 내 생활은, 같은 생활인가? 수업을 들을 수도 없는데. 아이, 음식 등 가장 일상적인 일 때문에 험악해지는 분위기. (중략) 그래, 결혼 전에는 이런 순간을 상상할 수도 없었지. 나는 그를 용서하지 않는다. 나는 끊임없이 이해해야 하는 함정에 빠지고 싶지 않다. 미소 지으며 그를 맞아주지 않았고, 뜨거운 음식을 식탁에 올리지 않았고, 골칫덩이 아이를 그의 눈에 띄게 두었다고 해서,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 않다. 내가 '밖에서' 일하게 될 때, 그가 요구했던 특권들을 내가 일깨워 주기만 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옳았다. 이제는 전과 같은 생활을 할 수 없다.
책의 전체 페이지 250쪽 중 대략 200페이지에서부터 첫아이가 등장하는데 여기서부터 50장은 정말... 밑줄을 긋는다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촌철살인의 연속이다. 아이를 사랑하면서도 지겨워하는 마음, 문득 아이가 지겨운 순간마다 드는 죄책감, 남편에 대한 질투, 자신의 현재를 향한 공허함, 기혼 여자들의 결속과 무의미한 일상, 하루에도 몇 번씩 차리고 먹이고 먹고 치우고 입는 일의 지긋지긋함, 그래도 나는 남편이 있지 않은가 싶은 안도와 겨우 고작 그것에 안도를 찾는 자신의 한심함 등등. 자신의 일을 찾고 싶은 마음과 육체적 피로와 아이에 대한 책임감 등이 혼재되어 나는 이 삶을 경험해 보지 않았음에도 이 모든 과정과 혼란과 우울과 분노와 체념이 마치 내 것 같아서 문장 문장마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리고 이 책은 이렇게 끝난다.
겨울에, 나는 첫째 아이의 걸음에 맞춰 안시의 거리를 돌아다녔다. 기차역 광장에 있는 작은 공원의 분수대 한가운데의 조각상 위에서는 물이 더 이상 흐리지 않았다. 온몸을 따뜻하게 감싼 둘째 아이는 자신의 유아차에서, 연못 주위를 지그재그로 움직이는 비둘기들을 잡으려 애썼다. 나는 내 육신이 사라진 듯한 느낌을 받았고, 오직 시선만이 광장 건물들의 정면에, 생 프랑수아 학교의 철문에, 사보이 영화관에 얹혀 있었다. 영화관에서 상영하던 영화의 제목은 잊어버렸다.
끝에 거의 다 왔다, 거의 다. 이제 나는 곧 내가 끔찍이 싫어했던, 주름지고 비장한 얼굴들을 닮아가리라. 미용실 샴푸대에서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젖히고 있던 얼굴들을. 얼마나 걸릴까. 더는 숨길 수 없는 주름, 쇠락이 바로 앞에 와 있다.
이미 나는 그런 얼굴이다.
이 책은 프랑스에서 1981년 처음 출간됐고 작가는 이 책의 출간 후 이혼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가, 이 한 여성의 이야기가 2024년에도 여전히 공감을 불러온다는 것에 더 경악해야 할지 아니면 심지어 프랑스에서는 40년을 앞서 이런 깨달음을 얻은 이가 있다는 것에 씁쓸함을 느껴야 할지를 모르겠다.
작가는 결코 자신의 이름을 표기하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그렇다고 1인칭이라 못 박지도 않았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사실, 모든 여자들의 것으로 돌려야 마땅하다. 그렇다 하여 세상 모든 결혼을 무용하고 무가치한 일이라 폄훼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아직 우리 세상에서, 거창하게 말하자면 이 행성에서 남성의 결혼과 여성의 결혼의 의미는 출발부터 끝까지 모든 게 너무 다를 뿐이다. 이 책을 일례로 들자면 같은 문학상을 수상한 남성 작가들은 헌신적인 부인이 있거나 아니면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어머니나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하는 비서가 있었음을 확신하지만 여성 작가인 아니 에르노는 이혼 선택함으로써, 오롯이 자기 자신에 집중할 수 있었기에 창작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고 결국 그 가치를 드리울 수 있었다. 하물며 어떤 경지에 이르른 사람들조차, 업계의 최고 자리에 오른 사람들조차 그럴진대 일반적인 우리 여성들의 삶을 어떨까.
여성이 결혼을 하지 않고, 돌봐야 할 아이가 없고, 자기만의 일이 있어서 경제활동을 하고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일'인지 새삼 깨닫는다. 그리고 그 때문에 바로 사회가, 온 세상이, 이 지구의 역사가 여성의 피임과 비출산, 비혼에 대해 경계하며 흘러왔구나.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한 번 절실히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 저자
- 아니 에르노
- 출판
- 레모
- 출판일
- 2021.03.09